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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은 역설의 언어로 구성된다. 길을 찾다 보니 잃게 되고, 나아가다 보면 주저앉기 마련이다. 이 모순 속에서 완전함을 향한 불완전한 존재의 내적 투쟁은 삶 그 자체로서 ‘나’를 형성한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1)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 Faust>의 명구가 소환되는 지점이다. 이는 파우스트를 놓고 메피스토펠레스(이하 메피스토)와 내기하는 주님의 또 다른 대사와 함께 주제를 내포한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p.93)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삶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존재론적 의미에 천착한 <파우스트>가 동명의 연극(양정웅 연출)으로 재탄생했다. 레제드라마(Lesedrama)2)인 원작이 어떻게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고 극적으로 형상화될지 먼저 물음표가 붙었다. 이는 개막 후 느낌표로 바뀌었고, 감각적인 연극 문법에 녹아든 배우들의 연기 합은 작품의 밀도를 높였다. 특히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타이틀롤인 파우스트를 ‘노(老)학자 파우스트(유인촌 분)’와 ‘젊은 파우스트(박은석 분)’로 분리했는데, 1막에서 이미 구축된 인물을 2막에서 일원화하는 과정은 흥미로운 예술적 체험을 제공한다. 이 값진 여정을 떠나고 있는 박은석 배우를 LG아트센터에서 만나보았다. 살아진 삶을 새롭게 살아내는 것, 그의 연기적 고민은 다시 ‘성장’을 향한다.
“1막 때 뒤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선생님의 호흡과 극의 흐름을 팔로우하고 있다가 등장하는 게 중요하니 늘 함께하고 있어요. 어쩌면 판타지적이라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여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물론 연출님도 그러길 원하셨던 것 같고요. 그래도 1막에서 쌓아 올리신 감정을 다 무시하고 들어갈 순 없었죠. 젊어진 파우스트 안에는 늙은 영혼이 있어야 하니까요. 메피스토와 싸우는 신들에서는 악마의 덫에 걸린 모습도 보여야 하고, 묵직한 선들이 있어야 확실한 흐름을 가질 수 있어서 고심이 많았죠.”
사실 명명백백하지 않은 경계적 인물은 난해한 텍스트이다. 그만큼 그는 공백을 채워 여백을 둠으로써 파우스트의 변화와 합일, 상승을 위한 하강의 순간을 극대화했다. 힘든 순간 선택과 집중을 하며.
“암벽신이 연기 테크닉적으로는 가장 어려웠어요. 끊김이 없이 몰아쳐야 하는데 암벽도 올라타야 하고 격양된 감정에 대사도 크고 장황하니까요. 감정적으로는 감옥신이 가장 힘들죠. 연기할 때 대사가 많으면 목표가 정확하잖아요. 그런데 그 많은 (그레첸의) 대사를 듣고 있는 저로서는 지문이 있지 않은 이상 불분명하죠. 수많은 경우의 수 안에서 적절히 선택해 진정성 있게 보이는 게 가장 어려워요.”
진보는 무지(無知)에 대한 자기 인식에서 움튼다. “인식했으면, 무엇이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지.”(p.101) 노학자 파우스트는 인식에 대한 욕구, 진리 추구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갈망한다. 본다(see)는 것은 곧 안다(see)는 것이다. 이러한 파우스트의 특수성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인물의 어떤 면이 우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그 ‘어떤 면’이 있을까.
“저도 이제 젊은 나이는 아니다 보니 공허함도,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도 많아지더라고요. ‘Who Am I?’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죠. 내가 살아가는 이유, 사명감, 목표, 우리는 왜 이 지구에 와서 존재하는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우주의 원리, 진리와 믿음에 관해 많이 얘기했어요. 그래서 파우스트가 천상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욕망과 이를 알 수 없음에서 오는 좌절감이 저와의 가장 큰 공통점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러니하죠. 늙은 파우스트이기 때문에 느끼는데(웃음).”
<파우스트>는 구약의 ‘욥기’를 연상시키지만, 욥이 고난의 파도에 휩쓸린다면 파우스트는 지상의 향락을 만끽하게 되면서 비극의 씨가 배태된다.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추기고, 파멸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파우스트는 창조이자 파괴의 힘인 욕망의 대립 구도에서 방황하는데, 그 저변에는 불확실성이 낳은 불안이 내재한다.
“우리가 살아있기에 불안한 것이고, 우리가 불안하지 않으면 죽어있는 것이다, 이 말을 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공감이 가더라고요. 저는 인간이 나약하다고 생각해요. 이 시대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철학, 신학 등에서도 많이 동떨어져 있죠. 그래서 시대를 반영하고 우리를 비추는 <파우스트> 같은 작품이 힘이 있는 거예요.”
선과 악, 자유의지, 구원 등은 시대를 관통해온 신학적·철학적 논쟁 주제로, <파우스트> 역시 이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악은 선의 결핍’이라는 관념을 수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에서 선과 악(윤리악) 모두 자유의지(중간선)에 기인함을 피력하며 “부정한 의지야말로 모든 악의 원인이다”3)라고 했다. “늘 악(惡)을 원하면서도 늘 선(善)을 이루고 마는 저 힘의 일부죠.”(p.199) 자신의 모호함을 이렇게 밝힌 메피스토. 이 낭만주의적 악마는 악한 본성·욕망으로 파우스트 내부에 존재할까, 악의 메타포·인격화된 악으로서 외부에 현존할까. 여기서 남은 난제는 파우스트의 ‘구원’이다. <파우스트>는 악은 선에 의해 부정은 긍정으로 극복되어 삶은 거듭나고 고양됨을 역설한다(제2부의 결말, 연극은 제1부만 다룸). 상연 시간 165분간 파우스트의 인식 변화와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의 내연이 확장되는데, 엔딩신은 진한 여운을 준다. 파우스트의 텅 빈 표정은 그의 공허한 심리적 공간에 공명하게 한다.
“파우스트는 신을 불확신 속에서 확신하는 존재고, 확신 속에서도 불확신하는 존재라고 치부하며 자신만의 언어 표현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그레첸이 구원받을 때 겁을 먹어요. 악마와 계약한 상태에서 신의 존재를 봤고, 신이 자신을 부르니 엄청난 공포심이 있죠. 신에게 다가갈 수도 없고, 확연히 구원된 존재도 있으니 빛이 너무 밝아 볼 수 없어요. 신 앞에서조차 비겁해지고, 신앙심의 무너짐까지, 그런데도 인간은 살아남으려는 욕망이 있죠. 어쩔 수 없이 메피스토의 손을 잡고 불확실한 길을 가는데, 그 감정이 저도 되게 강렬해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크죠. 신 앞에서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이에요.”
배우의 삶은 배우는 삶이다. 공연 한 편을 하면 삶을 더 배울 수 있다는 그는 <파우스트>라는 힘겨운 산을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를 살다 간 괴테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파우스트>는 중세적 세계관을 넘어 근대적 개인, 행동하는 인간의 표상인 ‘파우스트적인 인간’을 제시했다. 괴테는 자신의 참회록과 같은 <파우스트>를 탈고(脫稿)하고 나서야 비로소 탈고(脫苦)했을까. 그의 손에서 벗어난 <파우스트>는 우리 안에 있는 사랑, 양심과 욕망, 시대정신에 따라 다시 쓰이고 읽힐 것이다. 결국,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글. 김신영 편집장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샘컴퍼니, ㈜ARTEC
1)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전영애 역, <파우스트>(제1부), 도서출판 길, 2023, p.91. 이하 본문에 페이지만 표기.
2)혹은 부흐드라마(Buchdrama), 영어로는 closet drama. 무대에서 구현되도록 고안되었다기보다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서재극(書齋劇).
3)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 분도출판사, 2021,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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